그 많은 고추 언제 다 딸꼬?

2010. 6. 26. 10:38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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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미야,
이번 주에 특별한 일 있냐?
집에 왔으면 하는데.”
“알았어요. 근데 무슨 일 있어요?”
“고추 한 번 따야겠다.”
“벌써 붉었어요? 좀 있어야 되지 않나?
여기 고추들 보니까 아직 파랗던데.”
 “아직 딸 정도로 많이 붉은 건 아닌데, 그래도 꽤 있더라.”
 
아침밥을 먹으면서 남편한테 고추 따야 한다고 하자
옆에서 밥을 먹던 서현이가 고추 딸 거냐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내가, 내가’ 하면서 갑자기 식탁의자에서 내려와 문 밖으로 뛰어 나갑니다. 하도 쏜살같이 뛰어나가는 바람에 ‘왜 저러나?’ 생각할 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잠깐 뒤에 돌아 온 서현이가 들고 온 것은, 뜨악! 고추였습니다.
 “김서현, 너 문 앞에 있는 고추 땄지?”
“네. 엄마, 딴 것도 다 따올까?”
“그걸 따면 어떡해! 엄마가 빨간색이 돼야 따는 거라고 했잖아.”
“엄마가 고추 딴다고 했잖아요?”
 “누가 그 고추 딴다고 했냐. 으이그 이 말썽꾸러기!”
시골에서 고추 심을 때 아이들한테 고추 열리는 거 보여 줄려고
화분에 심어 가지고 온 고추가 5개 열렸는데,
애기 고추가 열린 날부터 ‘딸까? 딸까?’하면서 고추 못 따서 안달이더니
결국 오늘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늦은 걸 어떡하겠습니까.
할 수 없이 고추장 푹 찍어서 한 입에 먹어 버렸습니다.
제법 컸었는데, 조금만 있으면 붉어 질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약간 매운 맛이 들은 것이 먹을 만하던데요.
“서현아, 이제 문 앞에 있는 고추 따면 안 돼 알았지? 붉은색으로 변하면 따는 거야.”
“이잉~따고 싶은데.”
“그럼 서현아, 내일 영광 할머니 집에 갈 건데,
할머니 집에 가면 고추 많으니까 할머니 집에 가서 따면 돼지.”
 “영광 할머니? 그래, 그래 그거 좋겠다. 할머니 집 고추 내가 다 딸 거야.”
서현이가 손을 높이 들고 좋아라 하면서 폴짝 폴짝 뛰어 다닙니다.
.
‘고추 따는 게 뭐가 좋다고.’ 갑자기 한숨이 푹, 기운이 쪽 빠집니다.
농사일이야 다 힘들지만 논 일 보다는 밭 일이, 그리고 그 중에서도 고추 따는 일이 제일 힘듭니다.
어떤 분들의 경우에는 고추 따는 일이 ‘마음의 풍요’를 따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본업으로 고추 농사를 짓는 경우에는 고추 따는 것만큼 고된 일이 없습니다.
우선 시골집 고추밭은 그 길이가 너무 깁니다.
고랑은 20개 정도인데, 고랑 하나의 (길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길이가
대략 1백 미터는 족히 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럼 총 길이는 2㎞. 이 거리를 쨍쨍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허리 숙이고 오리걸음으로 간다고
생각해보시면 대략 고추 따기의 어려움이 짐작이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구나 산 밑에 있는 고추밭이라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 등으로 어찌나 땅이 거름진지,
그리고 나무들로 인해 응달이 생겨 고추가 거짓말 안 보태고 제 키보다 큽니다.
그래서 고랑과 고랑 사이에 고추터널이 생길 정도입니다.
그러다보니 땅을 거의 기다시피하면서 고추를 따야 합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무릎을 펴거나 허리를 펴면 엉켜 있는 고추가지가 부러지기 때문입니다.
고추는 또 왜 그렇게 안 따지는지. 원래 서서 고추를 따면 고추 보다 위에 있게 되므로
밑으로 열린 고추는 ‘툭’하고 잡아당기기만 해도 ‘똑’하고 명쾌하게 따지는데,
쪼그려 앉아서 고추를 따면 고추를 들어 올려 따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서서 할 때처럼 잘 안 따집니다.
빨리 빨리 따도 시원찮을 판에 고추 하나 따는데도 이렇게 애를 먹으니 고랑 하나 따는 데도
족히 1시간은 걸립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꾹꾹 참고 고랑 끝에까지 겨우 와서 터널을 빠져 나와 허리를 폅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는 순간 한 고랑을 끝냈다는 기쁨보다는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고추밭을 보면서 ‘저 많은 거 언제 다 따나?’
긴 한숨과 함께 기운이 쪽 빠집니다.
한 마디로 일하기가 정말 싫어집니다.
어느 해인가는 하도 지치고 짜증나서 옆 고랑에 있던 어머니한테 ‘태풍 불어서 고추 다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가 크게 한 번 혼이 난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힘들다보니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드는 것을.
아이고!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고추밭에서 고추 따고 있는 제 모습이 선하네요.
으, 그 많은 고추 언제 다 딸꼬! 벌써부터 한 숨이 나옵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올해도 고추가 어른 키만큼 크고 고추도 실하게 엄청 많이 열렸다던데.
그래도 우리 어머니 고생을 덜어드리는 일이니 기쁜 마음으로 해야겠지요?
그리고 올해는 언니와 형부도 오신다고 하니 일꾼이 많은 만큼 일도 빨리 끝나겠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카들과 서현이가 고추밭에서 뛰어놀면서 청량제 웃음을 들려줄 생각을 하니 올해는 고추 따는 일이 그리 힘들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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